춘화(春花)의 춘화(春化)
은종일
나 어릴 적에 보리농사는 다섯 식구가 일 년 동안 버티어 갈 양식이자 나의 학비였다. 겨울방학 때, 보리밭에 외양간 거름을 내면서 꽁꽁 얼어붙은 보리 순들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해동하자마자 작은집 빈 밭에 삼촌이 봄보리를 파종했다. 늦깎이 파종이라 거름에다 비료까지 넉넉하게 시비했다. 봄보리는 가을보리보다 검푸르게 웃자랐다. 하지만 뒷날 추수 때는 부실한 이삭이 몇 개씩 듬성듬성 보일 뿐 옳게 패지도 않았다. 생각과 달리 얼어 죽을까봐 걱정을 했던 가을보리밭의 보리는 탐스럽게 이삭을 맺었다. 그때 보리는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잠을 푹 자야 이삭이 패고 씨알이 영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훗날 도회지에 나와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나 더 겪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여름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했다. 집들이 선물로 참꽃분재를 받아 베란다에 두고 정성들여 키웠다. 산야의 것들에 비하여 줄기는 튼실하고 잎은 살쪄서 윤기가 흘렀다. 하지만 이듬해 봄이 다 가도록 꽃을 보지 못했다. 이사를 와서 그러려니 하였건만 그 다음해도 꽃피울 낌새조차 없었다.
야생화를 전문으로 기르는 지인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아파트 베란다의 온도가 너무 따뜻해서 꽃을 피우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야기만 듣고도 곧바로 진단을 내리면서 "춘화현상이므로 춘화처리를 해야 한다."고 일러줬다. 춘화현상은 겨울종 식물이 겨울 한철 동안의 저온 기간을 거쳐야만 꽃을 피우는 현상이고, 춘화처리는 개화를 촉진하거나 씨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식물이나 씨를 인위적으로 낮은 온도에 잠시 두는 것이라는 걸 바로 알았다. 식물계에서 통용되는 춘화현상(春化現象)이 멘델의 유전학설을 비판한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농생물학자 리센코(T.D. Lysenko)가 주창한 리센코학설이라는 것까지.
어릴 적에 생각했던 보리의 겨울잠이란 것이 곧 보리의 춘화현상이고, 봄보리의 부실한 수확이나 참꽃분재의 개화불능은 춘화처 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개나리, 진달 래, 철쭉, 목련, 라일락, 튤립, 백합 등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겨울종 식물은 혹한과 설한풍을 춘화의 에너지로 삼는다는 것을 말이다.
가녀린 꽃눈들이 춘화에의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낼 때 비로소 아름답게 꽃피우고, 풍성하게 열매 맺는다고 생각하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어찌하여 봄꽃 식물들이 이렇게 우리 인생을 꼭 빼어 닮을 수 있을까, 라며 감탄을 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반복되는 춘화현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견디어내야 할 혹독한 겨울이 있게 마련이다. 그 겨울을 견디어 내면 꽃피는 봄이 뒤따르지 않던가. 견디기 힘든 겨울이 봄꽃에겐 춘화(春化)라고 하는 선물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있어서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이나 고난도 우리 인간에겐 삶을 꽃피울 에너지이자 선물이 아니겠는가.
춘화(春花)의 춘화(春化)를 생각하며 춘화(春化) 누나를 떠올린다. 할아버지께서 유별나게 봄꽃을 좋아하셔서 지으신 이름이지만, 춘화(春花) 누나의 춘화(春化)는 잔인할 정도로 혹독하였다. 내가 첫돌 지난 이튿날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오누이로 자란 여섯 살 위의 누나는 그때가 여덟 살이었다. 아버지와 함께한 공주 같은 생활은 거기까지였다. 서른에 청상이 되신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자랐다. 약질에다 고운 심성 때문에 누나의 농사일은 성장기 내내 인고와 서러움이었다.
열아홉 살에 어른들이 정해주신 산 너머로 순종의 눈물을 쏟으면서 시집을 갔다. 그때를 떠올리며 "개구리 벼랑 뛰는 심정으로 결혼했다. "고 하였다. "시집을 가서도 산 너머 어머니와 동생 걱정에 참 많이 울었다. "고 했다. 누나는 눈물이 흔했다. 춘화(春化)를 위한 눈물이었던가. 삶이 곧 춘화(春化)였던가. 가끔 둘이 만나면 반가워서 울고, 지난날 이야기하면서 서러워서 울고, 헤어짐이 못내 서운해서 또 운다. "수도꼭지 잠그세요."라고 우스개를 하면서도 그때마다 치미는 속울음 때문에 애써 시선을 피하곤 했다.
지난 봄, 봄꽃이 질 때 춘화(春花) 누나는 반려자를 떠나보냈다. 영정 속의 반려자와 묵언하며 영원한 이별의 고통을 삭이는 누나에게서 성스런 의식을 느꼈다. 새로운 춘화(春花)를 위한 춘화(春化)가 아니라 춘화(춘화)의 완성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억척같이 일하여 자립농장을 일됐고, 못 배운 한을 다섯 자녀의 교육에 쏟아부어 하나같이 반듯하게 길러냈다. "할 만큼 다했다."는 쉰다섯 해의 결과라는 현재에서 누나 춘화(春花)의 춘화(春化)의 열매를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몽테뉴는그의 저서 『사색의 광장』 서 인생의 희망은 늘 괴로움의 언덕길 그 너머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삶 안의 시련이 춘화(春化)요, 이룸이 춘화(春花)일진대 그래도 시련은 기피의 대상이련가?
'추천 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걸어 다니는 비석 - 김한성 (0) | 2014.09.29 |
---|---|
사라진 것들의 마지막 처소 -최민자 (0) | 2014.08.22 |
섬인 채 섬으로 서서 - 변해명 (0) | 2012.08.09 |
치마/문정희, 팬티/임보 (0) | 2012.06.26 |
나무-한흑구 (0) | 2012.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