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무
한흑구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뜰 앞에 서 있는 나무, 시냇가에 서 있는 나무, 우물 둑에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 길가에 서 있어 길 가는 사람들의 쉼터를 주는 나무, 산꼭대기 위에 서 있는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하다.
그것이 어떠한 나무인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꽃이 있건 없건, 열매를 맺건 말건, 잎이 떨어지건 말건, 나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그것이 아메바로부터 진화하였건 말았건, 그러한 나무의 역사를 상관하지 않는다.
흙에서 나고, 해와 햇볕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자라나는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온 얼굴에 맞으며, 동산 위에 홀로 서서, 성자인 양 조용히 머리를 수그리고 기도하는 나무.
낮에는 노래하는 새들의 품안에 품고, 잎 마다 잎 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
저녁에는 엷어 가는 놀이 머리끝에 머물러 날아드는 새들과 돌아오는 목동들을 부르고 서 있는 사랑스런 젊은 어머니와 같은 나무.
밤에는 잎마다 맑은 이슬을 머금고, 흘러가는 달빛과 별 밝은 밤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별똥들을 헤아리면서 한두 마디 역사의 기록을 암송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너는 십일홍(十日紅)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이 되라."
이것은 내가 중학 시절에 멀리 미국에 망명중이시던 아버님이 편지마다 쓰시던 구절이다. 지금도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아버님의 이 편지 구절을 생각하게 된다.
"높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소나무가 높이 쳐다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높아서가 아니라, 다만 높은 산꼭대기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높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산꼭대기 위에 서 있는 나무는 비와 바람에 흔들리어, 뿌리는 마음대로 뻗지 못하고, 가지들은 구부러져서, 후일에는 한날 화목(火木)밖에 될 것이 없다.
사람의 발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시냇가에 힘차게 자라는 나무들은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으나, 후일에는 좋은 재목들이 된다."
이러한 선철(先哲)의 말씀도, 내가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복돋워 주었다.
나는 나무을 사랑한다.
나는 마음속이 산란할 때마다, 창문을 열고 남산 위에 서 있는 송림을 바라다본다.
송림이 없다 하면 남산이 무엇이랴?
나무가 없다 하면 산들이 무엇이며, 언덕들이 무엇이며, 시내 강변이 무엇이랴?
나무는 산과 벌(들판)에서 자란다.
고요한 봄 아침에도, 비 오는 여름 낮에도, 눈 오는 추운 겨울 밤에도 나무는 아무 말이 없이 소복소복 자라난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성자(聖者)와 같은 나무.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나무.
끝없는 사랑을 지닌 어머니의 품과 같은 나무.
묵상하는 시인(詩人)과 같은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나는 언제나 나무를 사랑한다.
―《文化》(194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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