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재미와 의미로 교직한 카이로스의 삶
― 은종일 수필집 『재미와 의미 사이』를 읽고
장 호 병
|문장 발행인, 대구수필가협회장|
소본 은종일 사백께서 제2수필집 『재미와 의미 사이』를 상재한다. 축하드린다.
소본 사백을 처음 만난 것은 첫 수필집 『거리』를 출간하면서이다. 이미 수필집 두어 권 분량의 원고를 써두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일이다. 준수한 외모와 인품에 남자인 내가 이끌렸다. 내가 알고 있는 향기 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분을 보태게 되어 기뻤다. 소본 사백을 만나면서 나는 줄곧 이 향기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를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을 ‘소유적 인간’과 ‘존재적 인간’의 두 부류로 보았다. ‘소유적 인간’은 인간관계에서 소유를 중시할 뿐더러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남에게 적대적이 되기 쉽다. 소유욕은 끝간 데가 없기에 영원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존재적 인간’은 삶의 가치를 소유물의 많고 적음에 두지 않고 더 높은 자아완성에 두기 때문에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매사에 당당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덜하다 할 것이다.
현대사회가 이미 소유지향의 삶에 젖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저자는 당시 현업에서 막 물러났을 때였다. 매일 아침 넥타이 매고 출근하던 사람이 은퇴라는 사회제도적 거세를 당하였을 때, 느끼게 되는 외로움과 방황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럼에도, 저자는 프롬이 말한 존재적 삶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기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향기를 발했던 것이다.
애써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저자는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특별히 상·장례지도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교우들을 위해 상·장례봉사활동을 하는 등, 이러한 봉사와 나눔의 실천이 향기를 더했을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더불어’ ‘나눔’이라는 실천덕목은 닉네임 ‘길동무’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이번 수필집 『재미와 의미 사이』는 저자가 현업에서의 은퇴 후 봉사와 나눔, 그리고 문학 활동이란 인생 이모작으로서의 수확물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소본 사백이 일관되게 존재론적 삶을 추구해 왔다 하더라도 소유지향의 현대사회에 한 발을 디뎌야 하기에 인간적 고뇌와 쓰라림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책머리에서 밝혔듯이 저자는 ‘참나’를 향한 깨달음을 구체적인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구도자적 삶의 모습을 반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수필집은 저자의 삶과 철학과 신앙에 대한 존재론적 자기 고백서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작가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무질서와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 그 자체일 것이다. 작가는 이 카오스 속에 존재하는 질서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해석되거나 정의되지 않은 세계, 카오스에 대하여 작가는 쓰기를 통하여 이를 질서화하고 가치를 정하며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카오스가 현상이라면 작가가 해석해낸 세계는 코스모스가 될 것이다.
저자도 ‘세상은 느끼는 것만 보이고,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해변에 사는 사람에겐 바다가 보이지 않고, 산골에 사는 사람에겐 산이 보이지 않는다.’(「꿰차지 못해서」)고 밝히고 있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카오스 속에서 건져올리는 코스모스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세상은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이를 해석해내는 혜안이나 심안을 통해 재탄생되는 것이다.
까치소리가 재미라면 재 넘어오는 기쁜 소식은 의미다. 쌈밥이 재미라면, 농심은 의미다. 쏠쏠한 돈벌이가 재미라면 번 돈의 나눔이 의미요, 일이 재미라면 목표의 가치가 의미다. 또 육체적 사랑이 재미라면 둘이 하나 됨이 의미요, 친교가 재미라면 삶의 완성을 향한 동행이 곧 의미이리라.
재미는 쉽고, 짧고, 얕은 것 같은데 의미는 어렵고, 길고, 깊어 보인다. 재미가 맛깔스럽다면 의미는 멋스럽다고 여긴다. 재미가 본능적 감성적 형이하학적인 현실이라면, 의미는 정신적 이성적 형이상학적인 이상으로 통한다. 게다가 재미가 눈높이 대접을 받는다면 의미는 눈 위의 대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재미와 의미는 상대적이다.
― 「재미와 의미 사이」 부분
저자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길어올리는 데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동원하여 독자를 명징한 코스모스의 세계로 안내한다. 소본 사백은 수필창작에 있어 양팔저울을 곧잘 사용한다. 한 쪽에는 현상과 재미를 다른 한 쪽에는 본질과 의미를 올려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코스모스에 평형을 잡게 하는 독특한 창작방식을 취하고 있다.
과거 할머니와 외할머니로 구분하던 호칭이 이제 대구할머니와 구미할머니로 바뀌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거꾸로 친할머니와 할머니로 불려진다. 그러니 할머니는 친할머니로, 외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로. 결국 과거의 외할머니란 외로운 자리에 친할머니가 자리하게 된 처지가 아닌가. 선돌이 박힌 돌을 빼고 그 자리에 누운 격이다. 반세기 만에 이룬 엄청난 변화의 자리에.
― 「‘친’자가 붙어 더 외로운」 부분
저자는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주 사소한 삶 속에서도 예리한 관찰력을 발휘한다. ‘친’자가 붙고도 더 외로워야 하는 친할머니의 발견은 우리의 가족구조가 여성중심으로 이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지 넘치는 풍자이다.
예부터 우리 한국어는 가사를 함축된 한마디로 ‘살림’이라 한다. 이같이 ‘살림’이란 말 안에는 참으로 깊은 뜻이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집안 살림을 하는 주부의 손길을 통해서 온 가족의 몸과 마음이 살림을 받고 있다는 의미를. 기계적인 홈 메이킹이나 단순한 가사노동(home labor)이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살려주는, 가족의 마음을 살찌워주는 거룩한 사명과 몸을 던진 헌신의 의미이리라.
― 「살림이나 하지 뭐」 부분
이처럼 그의 수필 중 대부분은 지성의 산물로서 저자는 삶을 성찰하고, 이는 다시 작품으로 반영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은종일 수필의 문학성과 철학성을 겸비하는 향기높은 수필창작의 바탕이 되고 있다.
2. 줄탁동시
은혜는 잊고 작은 것이라도 베푼 것만 생색내기 쉬운 것이 우리네 삶이다. 세상에는 저 잘나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의의로 많다. 저자는 세상살이를 줄과 탁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한다. 내가 끊임없이 줄을 시도했을 때, 누군가 때맞추어 탁은을 베풀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다.
가정에선 부모형제와, 학교에선 선생님과, 직장에선 동료나 상사들과, 사귐에선 우인들과, 사회에선 이해당사자들과의 줄탁이 이어진다.
줄탁동시, 이것이야말로 뜻을 이루고, 마침내는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려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더러 뻐꾹새나 찌르레기 같은 이를 만나 탁란(托卵)의 질곡을 헤쳐 나오느라 혼신을 다하기도 했지만, 나의 줄()에 탁은(啄恩)을 베푼 분들이 엄청 더 많았다. 그러기에 세상은 따뜻한 가슴으로 살 만한가 보다.
― 「줄탁동시」 부분
작가는 우리 삶의 무대를 줄탁동시를 실천해야 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살기 좋은 세상은 시간의 거리로 좁혀져가는 공간의 거리, 살맛나는 세상은 끼리로 만들어지는 신분거리가 아니라, 인격들이 다져가는 인격거리에서 나오’(「거리」)는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인격거리는 크로노스적 거리가 아니라 바로 카이로스적 거리로서 상대의 ‘줄’에 내가 ‘탁’을 보낼 수 있어야 하며, 나의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탁은이라는 사실의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술사랑과 아내사랑은 모래시계인가? 술사랑이 커지면 아내사랑이 작아지는 것처럼. 정녕 술사랑과 아내사랑을 함께 키울 수는 없는 것일까? 빠지면 안 된다는 술사랑과 빠질수록 좋다는 아내사랑을 정녕 함께 할 수는 없단 말인가?
술사랑이 아내사랑의 얼마만한 빈자리이려나. 이제 늦깎이지만 술사랑보다 아내사랑이 먼저여야 할까 보다.
― 「애주가의 변(辯)」 부분
저자는 애주가이다. 대부분의 경우 친구 좋아 술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술사랑은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려 하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늦은 귀가를 전제한다. 그래서 술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란 등식을 만든다. 하여 술사랑과 아내사랑은 반비례하기 일쑤이며, 어느 한쪽으로 쏠리기 쉽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양자와의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건너왔다.
더러 술잔에 고춧가루가 묻어도 엄지손가락으로 쓱쓱 비비고는 개의치 않고 받아 마시는 것이 이 땅의 풍속도이다.
나의 술잔과 너의 술잔이 따로 없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우리의 술잔에는 술만 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네 마음도 담아 건넨다. 시르죽은 원기를 회복케 하고, 우정의 다리가 되어주고, 오해나 곡해로 막힌 이해의 통로를 술술 뚫어주고, 가식과 허례의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게 하는 ‘우리의 술잔’에 감히 누가 시시비비하겠는가.
― 「우리의 술잔」 부분
상대하기 버거움은 공통점이 많은 서로 비슷한 사람 사이에 생기는 감정이 아닌가. 상대에겐 거꾸로 내가 상대하기 버거운 사람이 아닐는지. 그러고 보면 피할 수 없는 외길에서 만나는 나훌라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아갈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결국은 나 자신을 뛰어넘지 못해서 나훌라를 만들고, 키우고, 늘리는 것이라고.
― 「나훌라」 부분
인간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불편과 갈등은 ‘그 사람’이 아니라 ‘네 안의 나’ 때문임을 성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수필집에서 만나게 되는 작가의 성찰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자아 커뮤니케이션으로서 ‘대상과 작가’ ‘너와 나’를, 물아일체 물심일여의 경지로 묶어주고 있다. 작가가 어떤 대상을 썼든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로 귀결하게 된다. 이는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뒤퐁의 언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3. 죽음의 존재, 삶의 존재
포유동물의 어미 뱃속 양수에서 자란 태중의 새끼가 세상으로 나올 때, 그 새끼에게는 그것이 바로 죽음일 것이다. 곤충의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태어날 때, 그것 역시 그 애벌레에게는 바로 죽음이리라. 죽음, 새 생명으로의 건널목이라는 믿음이 ‘둘째’를 사는 나의 마음자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 「’팡세’의 팡세」 부분
일상의 생활 속에 죽음은 항상 공존하고 있다. 이를 깨닫고 삶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삶의 참의미는 드러날 수 있다. 굳이 하이데거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저자의 말대로 ‘죽음이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목’임을 깨닫는다면, 죽음의 불안을 덮어서 숨길 필요가 없으며, 타인은 단순한 경쟁상대가 아니기에 지금(now)과 여기(here)에 삶의 의미를 둘 수 있다.
“더 아프면 어려울 것 같아서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어서 불렀네. 모두 와줘서 고맙네.”라는 그 친구가 죽음을 이긴 인간 승리자처럼 보였다. ……중략…… 문제는 쾌락만 좇다가 갑자기 만나는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데 있으리니. 죽음을 갑자기 만난 그 친구가 인간승리자로 보이는 것이 안 풀린 숙제로 남아 있었다. ……중략……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후회 없는 삶’, 이것이 바로 삶의 목표이자 지상의 가치여야 한다는 학습을 친구의 ‘시한부 삶’에서 더 여물게 한다. 몸뚱이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 자체의 건강이라는 것까지.
― 「최후의 오찬」 부분
삶은 죽음이 있음으로 해서 정의될 수 있다. 선종봉사회장을 맡아 임종현장, 영안실, 화장장, 무덤까지 이어지는 삶의 여정을 지켜보면서 이승과 저승, 천국과 지옥의 경계는 무의미하며 이생에서의 수많은 만남은 그 자체로 천국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결론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철학은 삶을 지향하고, 종교는 죽음을 지향하며, 사랑은 삶과 죽음을 모두 지향한다고 하였다. 삶과 죽음과 삶의 지고의 가치인 사랑은 잘 살아가기 위한 트라이앵글과 같은 모델이다. 그러기에 알폰스 데켄은 “사람이 사랑에 대해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삶과 죽음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면서 삶과 사랑의 의의를 보다 새롭게 사색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바로 셋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어느 것도 깊이 통찰할 수 없어서이려니.
― 「만남」 부분
4. 카이로스의 삶
‘크로노스’는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돌면서 낮밤을 만들어가고, 공전궤도면을 일 년 주기로 크게 돌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동식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다. 어떤 일이 수행되기 위한 특정한 시간 또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계획이 세워지고 그 계획이 실행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저마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영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계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항해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목표점까지의 특정한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반추하며 역동적으로 미래를 향하여 살아간다.
― 「카이로스의 삶」 부분
크로노스가 숙명적 소멸이라면 카이로스는 의미의 창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이데거의 실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현존재가 존재하는 이유에 눈을 돌린다면 우리의 삶은 카이로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저자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트라이앵글을 언급한 바 있다.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도 사랑으로부터 외면당할 어떤 당위도 없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인생은 사소함으로 채워진다는 생각이 든다. 성공의 목표마저도 대부분 이루고 나서 뒤돌아보면 ‘존재의 눈’이 아닌 ‘소유의 눈’으로 봐왔던 것들이다. 에릭 프롬이 말하는 존재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존재의 눈’으로 보면 더 잘 보이지 않겠는가.
―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부분
천방지축 젊은이의 추함보다는 고운 자태로 거듭나는 노년의 삶이 더욱 더 아름다울 것이다. 겉껍데기는 늙어가도 속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꿈을 품고 사는 것,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러한 것들이 곱게 늙는 것이다. 겉이 늙어 갈수록 더불어 속도 더욱 낡아지는 것이 추하게 늙는 것이 아니겠는가. 늙음과 낡음은 모음 한 획의 차이지만 의미는 정 반대처럼 다르다. 늙음과 낡음이 들어서 삶의 미추(美醜)를 갈라놓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 과 원터 개프니는 “늙음이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희망의 근거이며, 천천히 쇠락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며, 견디어 낼 운명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일 기회다.”라고 하였다. 인생이 경주가 아니라 이러한 근사한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음미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노년의 삶이 좀 더 의연하고 여유로워지지 않겠는가.
― 「늙음과 낡음」 부분
사람이 온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망치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설파했다. 저자의 존재이유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며, 저자가 카이로스의 삶을 지향하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지만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결국 삶도 선택의 문제다. ‘밥을 챙기는 삶을 살 것인가? 밥이 되는 삶을 살 것인가?’이다. 내가 살아온 모든 모습은 이 기준으로 가름할 수 있으리라. 나누지 않는 사랑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밥이 되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저 밥을 챙김으로써 자신을 빚쟁이로 만들 것인가이다.
― 「밥이 되는 삶」 부분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될 수밖에 없는 크로노스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적 창조와 이성, 사랑, 나눔의 존재적 가치는 실행할수록 커진다. 밥을 챙기는 삶보다 밥이 되고자 하는 삶, 바로 그가 추구하는 카이로스의 삶이다.
소본 은종일 사백의 수필이 빛남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미와 추, 그 경계에서의 실존적, 존재론적 이유를 깨달은, 카이로스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존재적 삶의 산물이 빚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재미와 의미로 교직된 이 수필집에서 실존적인 삶의 의미를 만나게 될 것으로 기대하며 어쭙잖은 사족을 거둔다. 제3의 수필집에서 새로운 작품세계와 만나게 될 설렘을 뒤로 하며, 이 책이 많은 독자와 만나 공감대를 넓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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