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끼오
꼬끼오
장 호 병
강을 가로질러 달려온 희미한 새벽닭소리에 창 쪽으로 눈이 갔다. 눈 아래 가로등은 안개 속에서 졸고 실내를 훤히 담았던 창은 점차 창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새벽이면 닭 울음소리를 희미하게나마 자주 듣는다. 몇 십 년만에 들어보는 소리인가. 아파트촌에서 말이다. 강 건너는 나의 전망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고층 아파트가 비껴 서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내다보면 얕은 산과 들이 있긴 해도 닭을 키울 만한 농가가 흔치 않을 터이다. 좀 일찍 일어나는 날이면 책을 읽다가도 닭소리를 고대했다. 공으로 유년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에 새벽잠에서 일어나기가 한결 가벼웠다.
강물에 출렁이는 노을에 반하여, 매일 삼십여 분을 출․퇴근길에 깔기로 하고 이 집으로 기꺼이 이사를 왔다. 하지만 밤이나 되어야 귀가하는 나에게 노을은 애초에 내가 감상할 몫이 아니었나 보다. 덤으로 얻은 전망도 야경도 다 시들해 갈 무렵 새벽의 닭 울음소리는 나에게 큰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그 소리를 엊그제 새벽엔 안방에서 너무나 똑똑히 들었다. 잠결에 위층이나 아래층 어느 집에서 닭을 키우는가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내가 닭을 사다 두었을 리는 없고 난 꿈인 듯 생시인 듯 닭소리에 홀린 게 분명했다. 이윽고 닭소리는 그쳤지만 그 생생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내려 잠결에서 허우적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다시 조금 전보다 훨씬 큰 소리로 또렷하게 ‘꼬끼오’를 연발했다. 나는 기어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그 소리를 찾아 나섰다. 더듬더듬……. 텔레비전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이 켜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아들이 서울로 가면서 아내에게 물려주고 간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내가 자명종을 대신하여 휴대폰에 맞춰둔 시각에 ‘꼬끼오’를 연발했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니 얼마간의 말미를 주었다가 다시 더 큰 소리로 우리를 깨웠다. 닭보다는 똑똑한 문명의 이기다. 아, 이제까지 새벽마다 희미하게 들었던 그 소리는 아들의 방에서 울린 알람소리였단 말이지!
닭은 될 수 없어도, 닭보다는 똑똑한 짝퉁 닭소리.
닭을 사다 키웠던들 그 소리가 나날이 즐거웠을까. 가리지널이 오리지널을 압도한다.
행세깨나 하는 집안 귀부인들의 경우, 수백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액세서리는 장롱 속에서 깊숙이 잠자고, 일이십만 원짜리 짝퉁이 진퉁 행세를 한다고 한다.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잃어버렸을 때 통쾌하거나 행복감으로 충만한다니 세상일은 겪어보지 않고서야 모를 일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짝퉁이 국내에서도 한때 많이 나돌았다. 프로스팩스, 나이키, 월드컵
이란 고급의 운동화 브랜드가 기차표, 타이어표를 누를 때 하이프로스팩스, 뉴나이키, 뉴월드컵 등의 라벨이 동이 난 적이 있었다.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근로청소년이나 학생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덴 이들 짝퉁이 큰 기여를 했으리라. 이 때문에 진퉁 또한 더 유명세를 탔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짝퉁 아파트까지 성행하고 있으니 짝퉁의 위력을 알 만하다.
외국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와 닮은 이미테이션 가수들이 오리지널 가수 못지 않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지만 국내에서도 너훈아, 조형필, 현찰, 하춘하 등 닮은꼴 가수들이 밤무대나 경로잔치 등에서 인기리에 활동하고 있다.
지난연말 동창들의 송년모임에서 가수 장윤정이 ‘어머나’를 깜찍하게 열창했다. 노래도 잘 불렀지만 주먹만한 얼굴은 이쁘고 귀여웠다. 노래가 끝난 후 인기에 걸맞게 저마다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팔을 길게 내뽑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이 지긋한 동창회장은 얼굴을 살짝 부비더니 “진짜예요!” 하며 물었다.
가리지널 짝퉁이 오리지널 진퉁을 능가하는 세상을 빗대었음이리라. 쌍꺼풀 수술은 예사이고 이쁘게 보일 수만 있다면 얼굴을 죄다 뜯어 고치는 것도 마다않는 세상이다. 부위별로 여러 군데를 고칠 때는 견적이라는 이름으로 비용을 산정해 낸다나. 신분증의 사진과 실제 얼굴 모습이 달라 애로를 겪는다는 경찰의 볼멘소리에 이해가 간다.
천당에는 한 번 피기만 하면 영원히 시들거나 지지 않는 아름다운 꽃이 있다. 하지만 향기가 없다고 한다. 진퉁에서 우러나는 향을 마다하고 만만한 쓰임새 때문에 스스로 짝퉁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중의 하나인가 보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낯설어질 때면 나도 눈가의 잔주름을 펴고 보톡스 주사라도 맞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어느덧 나도 나 안의 진퉁을 몰아내고 세속을 좇는 일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가끔 듣는 ‘꼬끼오’를 경계의 표석으로 삼아야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