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12 숙명적으로 써야 하는 존재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장호병∣문장 발행인
1.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크루즈 여행 중 거센 풍랑을 만나 배는 침몰해버렸고 관광객 중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무인도에 표류했다. 삼십대 중반의 절세미인 오드리 햅번과 가난하지만 성실한 미장이 총각이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무인도생활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는 연정이 싹텄고 마침내 잠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오드리 햅번은 그 청년에게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년은 매우 만족스러웠노라고 답하고서는 한 가지 부탁을 한다. 그와 절친했던 친구 토마스처럼 콧수염을 그리고 바지를 입어 달라고 했다. 동성애자가 아니라면서 깜짝 놀라는 오드리 햅번을 청년은 설득하였다. 마침내 햅번이 남장을 하자, 그 청년은 햅번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친구야, 나 햅번 먹었어!”라고 속삭였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 카시러 Cassirer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예화 속의 청년은 왜 토마스로 남장시킨 햅번에게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을까. 아마 그 말을 발설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야 한다면 그 청년은 제명을 다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소통을 통하여 나눔을 실천하려는 존재이다. 표현한다는 것은 곧 타자와의 나눔이다. 사랑하는 이와, 마음 맞는 이와 자신의 체험, 생각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 때 타자는 주체인 나와 상대적인 남이 되겠지만 때로는 나 안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다.
나눔은 말하기, 쓰기, 독백, 묵상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2. 살아있음을 무엇으로 보여줄 것인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데카르트는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여 ‘나’라는 것만이 자명하며 불변한 것이라 깨닫게 된다. 당시 인간의 생활은 모두 절대적인 신에의 봉사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각하는 나’를 발견해냄으로써 마침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Je pense, donc je suis)”는 명언을 남길 수 있었다.
데카르트가 사유하고, 회의하고, 생각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면, 우리는 살아있음의 증거를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살아있음을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내가 살아있음을 증거하고 싶을 때가 불쑥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소비한다, 나는 표현한다, 나는 춤춘다, 나는 읽는다, 나는 노래한다, 나는 조각한다, 나는 그린다, 나는 저축한다, 나는 배운다, |
계절마다 해외여행을 한다, 매주 음악회에 간다, 골프를 친다, 주말이면 외식을 한다, 선텐을 한다, 매주 마시지를 받는다, 정기적으로 보톡스를 맞는다, 그를 만난다, 양주를 마신다, |
고로 존재한다. |
일상에서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일들을 들어보면 이 세상에서 진실로 내가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고 있는 일들이다. 대개의 주부들은 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알뜰살뜰 가계를 꾸려나간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헛돈을 마구 쓰고 다니는 것을 안다면 그 부인은 ‘살아있음’의 본때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가족과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참아왔던 일을 후회하며 이제까지 자제해왔던 일을 마음껏 저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 가문을 일으키고 지켜나가는 것을 들여다보면 그 주체가 여성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姓)을 지키고 대물림하는 쪽이야 남성이라 하겠지만, 위계와 전통을 세우고 지켜나가는 쪽은 여성이다. 다시말하면 여성들의 희생 위에서 가문이라는 대물림이 가능한 것이다.
한 가문의 주부가 앞에 거론한 하고 싶은 수많은 일들을 제물로 하여 기도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가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리고 가족의 앞날을 위해, 가문의 중흥을 위해 우리가 희생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살아있음을 증거할 방법은 없을까. 아마도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가 될 것이다.
3. 고통스럽지만 숙명적으로 써야 하는 존재
베르더 Lutz von Werder의 말을 빌리자면 자아표현의 욕구야말로 살아있는 인간의 참을 수 없는 본능이다. 물론 글 속에서 자신의 생활이나 생각을 노출시켜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하필이면’ 큰 맘 먹고 세차한 날은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무엇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면 바로 내 앞에서 매진되고, 더욱이 얼마 전에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내 어깨에 새똥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 한동안 서서 나의 ‘하필이면’의 운명에 경악했다. 1천만 서울 인구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텐데 ‘하필이면’ 그게 나라니!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하필이면’도 있다. 남들은 멀쩡히 잘도 걸어 다니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느냐 하면 노래, 그림, 손재주 그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재능을 골고루 나눠주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필이면’ 나만 깜빡하신 듯하다.
언젠가 치과에서 본 여성지에는 모 배우가 화장품 광고 출연료로 3억 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중략>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 대로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커녕 3백 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 가지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3백 원도 못 받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내게 한심하고 슬픈 말이다.
―장영희, 「하필이면」 중에서
작가는 누구에게 보여주고자 이런 글을 썼을까. 작가는 자아와 상대적인 타자(他者)라 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나 아닌 다른 존재는 물론, 나 안에 있는 또다른 나 자신에게 쓰기도 한다. 여행자들이 최종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이 집이듯이, 대부분의 수필 작품에서 작가는 글 속에서 자신을 만나게 되어 있다. 이 글에서도 장애를 딛고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작가의 ‘하필이면’이란 숙명은 자신을 향한 속삭임이거나 외침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 또한 기도나 마찬가지라 해도 좋다.
좋은 글쓰기의 요체는 치열한 삶에서 나온다. 삶이 구슬이라면 글쓰기는 그 구슬을 꿰는 일이다. 고통스럽지만 글쓰기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에 버금가는 ‘되고싶은 나’로 다가가는 실천의지이자 자기 변화의 시도이기도 하다.